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앙도슈 쥐노 (문단 편집) == 일생 == 코테도르의 뷔시르그랑에서 유복한 농민이었던 미셸 쥐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샤티용에서 공부를 했지만 나중에는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수도 [[파리(프랑스)|파리]]로 상경,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그런거 다 내던지고''' 곧바로 자원해서 지원병 대대[* 척탄병 대대라는 말도 있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번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하사]]로 진급했다. 1793년의 툴롱 공방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으며, 곧 그의 부관이 되었다.[* 이 때 나폴레옹의 비서로서 일했던 당시의 일화가 참 대단하다. 어느날 나폴레옹이 불러줄 것이 있어 그가 받아적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포탄이 날아와 쥐노의 근처에 떨어져 폭발했고, 쥐노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 때, 쥐노는 대담하게 '''"흙은 이렇게나 많이 필요 없는데"'''(당시의 잉크는 그렇게 빨리 마르지 않아서 항상 문서 작성 후에는 고운 모래나 흙을 뿌려 한번 흡착해줘야 했다)라고 말했고, 나폴레옹은 그의 대담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그를 따라 종군했고, 거기서 큰 활약을 했지만 로나토 전투에서 심각한 머리부상을 당하면서 실려가게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획책한 [[이집트 원정]]에 [[여단장]]으로 승진하여 나폴레옹을 따라가게 되지만, '''하필''' 거기서 원정에 대한 불만으로 나폴레옹을 뒷담하던 라뉘스 장군에게 욱해 결투를 벌여 그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 결과 군내 결투를 엄금했던 나폴레옹의 질책을 듣고 근신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 뒤에 프랑스에 돌아가서도 한참을 요양하고 있다가 1799년에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자 다시 나폴레옹을 받들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듬해에 로레 마르탱 드페르몽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포르투갈]] 대사로 파견되었지만 1805년에 나폴레옹이 다시 전역을 준비하자 그를 모시기 위해 급히 귀환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그에게 프랑스 대육군 원수의 지휘봉을 쥐어주고, 육군 원수로 승진 시켜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지휘를 맡겼다. 1807년 포르투갈 침공을 감행, 포르투갈의 열악한 도로 사정과 산길을 겨우 뚫고 11월 30일에는 수도 [[리스본]]을 점령하여 나폴레옹의 치하를 받았다. 그 해 초대 아브란트스 공작(1st Duke of Abrantes) 공작의 작위를 받고, 포르투갈의 군정관이 되었다. 아마 쥐노 본인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소요 사태로 인해 본국 프랑스와의 연락이 모두 끊어지는 일이 벌어졌고 1808년에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8월 21일 비메이로에서 쥐노는 퇴로가 막혀 자신과 함께 군단이 전멸당할 위기를 겪게 되었다. 8월 30일 우여곡절 끝에 영국군과 신트라 조약을 맺어 그와 그의 군대는 무사히 포르투갈에서 철수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해 10월, 프랑스에 비참한 모습으로 그의 군대와 함께 돌아온 쥐노는 곧바로 [[군사법원|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불리했던 상황이었음이 참작되어 곧 풀려났다. 하지만 적에게 패해 사실상의 항복 조약을 하고 돌아온 것은 그냥 넘겨버릴 문제가 아니었기에, 쥐노는 경질되어 [[강등|책임을 물어 육군원수의 칭호와 지휘봉을 반납 해야했다]]. 1810년에 다시 돌아와서 [[앙드레 마세나|마세나]] 원수가 이끄는 군대에 합류하여 전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해도 역시 운이 좋지 않아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포르투갈 전선에는 겨울이 온 탓에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휴전 상태에 빠진 협곡 하나가 있었다. 이곳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초소는 서로 머스킷 사거리 안에 있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여기에 시찰을 나왔다가 영국군 보초가 총을 쏴서 코를 맞고 말았다. 웰링턴은 사과의 뜻으로 사절을 보내 필요한건 뭐든 구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쥐노는 보급품 부족이 드러날까봐 거절했다고. 이 일화는 영국군 95 라이플 연대의 장교 J. Kincaid가 쓴 회고록에서 언급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말 안듣는 러시아를 혼내주러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쥐노도 그와 함께 갔다. 그러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도망가게 놔 뒀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나폴레옹의 큰 질책을 받았다. 쥐노는 스몰렌스크를 탈출하는 [[바클라이 드 톨리]] 휘하의 러시아군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힘 잘 채우고 있다가 정신없이 탈출하는 러시아군을 쥐노 군단이 포위해서 박살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쥐노는 어쩐 일인지 적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당시 쥐노 휘하의 보좌관들은 쥐노를 독촉하며 당장 본대를 도와 러시아군을 박살내자 하였으나 쥐노는 요지부동, 결국 러시아군은 탈출에 성공하고 말았다. 이때 쥐노 휘하의 군은 프랑스 군단도 아닌 사기도 낮고, 전투 서열이 낮은 [[라인 동맹|독일인 군단들]] 이었는데, 적을 눈앞에 두고도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못했다는 수치심에 이들 조차도 이를 박박 갈았다고 한다.. 가끔 쥐노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는 아직 멀쩡한 상태였기에 왜 쥐노가 머뭇거렸는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으나,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바로 야간전이어서 쥐노가 조심스러웠다는 설이다. 4안 야간 투시경까지 나온 21세기의 오늘 날에도 야간전은 상당히 어려운데다가 야시경을 장착했는데도 피아식별 구분도 힘들어 아군들끼리 총질해서 팀킬 하는 사례도 꽤 많은데 이 당시엔 촛불이나 횃불을 비추는게 전부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쥐노도 쥐노지만 별다른 변수의 고려 없이 구멍투성이의 포위작전을 세운 나폴레옹의 실책도 매우 컸다. 하지만 쥐노는 보로디노 전투에서 8군단을 지휘하여 자신의 유능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1813년 쥐노는 [[일리리아]]의 행정관으로 취임했으나 정신상태는 극도로 불안해져 있었고,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모자와 신발만 신은 알몸에 훈장과 칼을 차고 참석했다고 한다. --과연 타고난 군인-- 결국 그로 인해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해 7월 29일 몽바르에서 향년 42세로 자살하였다. 후손으로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